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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3장 좋은 죽음

by Ka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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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죽음을 규정하기 보다는 죽음을 둘러싼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는게 낫다. 아울러 임종과정을 어떻게 지원할지 논의 해보는게 낫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환시점을 정확히 알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죽음의 정의? -> 삶의 정의? -> 인간의 의미

죽음은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도 아니고 성취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소유물이 아니다. 

죽음의 가치는 남들의 생각에 달려있지않다. 

내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이 우리 삶과 어울릴까? 

우리가 살기 위해 애썼던 방식을 살고 싶었던 방식을 죽음에도 반영할수 있을까?

막연히 좋은 죽음을 바라지 말고 적합한 죽음을 고민해보는게 낫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ex) 호스피스 : 행해질 수 있는 일이다 행해졌다고 판단될때 조용히 떠나는 책임감 있는 개인이 전제된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품위를 잃을 까봐 두려워 한다. So 조력사를 선택한다. -> 존엄사

존엄성은 우리가 가진 행심자질일까? 아니면 통제력 행사 여부일까?

- 핵심자질 --> 노화와 질병과 쇠약함이 영향을 미칠순 없다. 어른이 되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성향이 강해진다. 우리는 생활이 안정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록 자신을 더 당당히 드러내며 상대의 겉모습보다는 내며을 바라 보려 애쓴다. 자아가 확립되면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고 상대방도 있는 그대로 바라 볼수있다.

우리가 임종과정을 선택했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선택한 건 아니다. 죽음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전히 착각이다. 죽음은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벌어진다. 이것은 우리으 ㅣ본성에 속한다.

이것은 삶의 한부분이요, 살아가는 방식의 한부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부분이다. 그런데 왜 고개를 돌리려 하는가?

부처 - 존엄성은 자유의 가장 위대한 표출이다. 육신에 벌어지는 일때문에 훼손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몸을 통제할 수 없거나 스스로 돌보지 못하거나 결정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여전히 존재할수 있다.

평소 태도와 사고방식이 우리를 이끈다. 지믁부터 그런 자질을 기르고 익혀야 한다.그러한 자질이 몸에 배면 정신이 나가더라도 그대로 행동할 수있다. 죽음은 노라움으로 가득착 있을 것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병상을 지킬때는 당사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게 된다. 아울러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게든 고통을 덜어주고 싶ㅇ어한다. 하지만 돌보려는 마음에 자꾸 간섭하다 보면 환자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압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정이 그를 더 힘들게 할 수도있다. 세상의 온갖 계획과 지원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당신에게 통제력을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죽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틸수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죽음이 자기보다 훨씬 강한 존재를 알아차리고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 자주적 죽음, 명백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좋은 죽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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