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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능력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가[엘리트 세습]

by Ka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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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
기간 2021.02.22 ~ 2021.03
출판사 & 발행년도 세종서적 & 2020
키워드 현재사회의 엘리트 세습의 시스템
분야 철학
만족도 ★☆
페이지 504pg

 

읽게된 이유 : 

이런 부류의 책을 읽은지는 꽤 됬는데 이번에는 독서모임에서 이 책이 선정되서 읽게되엇다. 제목부터 흥미가 가기도 했고, 어떻게 엘리트주의가 세습되는지에 대한 책인 것 같아서 뻔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갖고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줄거리 & 작가 의도 : 

초반에는 엘리트주의가 나오게 된 배경, 초반 엘리트주의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추후에 엘리트주의가 어떤 양상으로 바뀌고 왜 엘리트들이 부지런하게 됬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현재 엘리트주의 + 능력주의가 우리 세계를 어떻게 악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 우리가 어떻게 이런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지 설명한다.

 

&

 

능력주의의 모순에서 벗어나려면 엘리트 뿐만 아니라, 중산층, 하위층 모두가 문제점을 깨닫고 함께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야한다.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 것 같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이 전 세계 대다수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정치적 의지를 모아 그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정치적 의지를 한데 모으면 정책수립에 더 큰 목소리를 낼 뿐 아니라 세상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책은 도덕적인 비난보다는 구조적 힘에 대한 정치적 인식이 현명하고 효율적인 행동의 필수조건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 책의 목표는 그 같은 인식을 지렛대 삼아 정치적으로 강력한 변화의 힘을 키우고 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 경제 질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총평 & 추천이유 : 

처음에는 너무 재미가 없고, 내용도 어려워서 그만읽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읽을 수록 퍼즐이 맞춰지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꼭 필요한 내용일까? 능력주의는 좋은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꿀만한 충격적인 내용이였다. 이 책을 이제라도 읽은게 다행일정도로 꼭 알아야되는 내용이 많아서 좋았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이 책은 어렵지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어디서도 얻기 힘든 정보들이며, 사고방식을 바꾸고 현재 사회의 문제점을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잘 알려준다.

 


좋은 글귀들 & 나의 의견 : 

서문

과거에는 세습되었던 엘리트 계층을 재능과 야망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외부인들에게 개방함으로써 평등과 기회를 촉진한다는 약속을 내건다. 또한 더 나아가 부와 지위가 성취를 통해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혜택과 공익이 조화를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한마디로 능력주의는 고된 노력과 기량, 합당한 보상이라는 이상을 퍼뜨림으로써 사회 전체를 통합하려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더 이상 약속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엘리트와 중산층을 갈라놓고 있다. 중산층은 기득권에 원한을 품고 엘리트는 특권 계층의 부정한 특혜에 집착한다. 중산층과 엘리트가 공유해야 하는 사회는 쌍방 비난, 무배려, 기능 장애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있다.

 

개개인의 악행보다는 사회와 경제구조가 불신과 불협화음을 유발해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한다. 본래 취지와 초기 성과가 무엇이든 간에, 오늘날 능력주의는 혜택을 집중시키고 해로운 불평등을 고착한다. 이 모든 문제의 주된 원인은 그것의 확산이다.

 

졸업식은 피할 수 없는 미래와 시간을 초월한 과거를 이음새 없이 연결하고 일련의 변화를 흡수하며 성년기의 문턱에 선 졸업생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능력주의로 말미암은 불평등이 확대되고 능력주의의 부담이 커질수록 능력주의가 도덕적이라는 주장은 흔들리고 그런 의례 절차는 힘을 잃는다.

 

물론 능력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보완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졌으며 초기에는 엘리트 계층을 다른 계층에게 개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 이동을 촉진하기보다 억제하는 요소에 가깝다. 한때 사람들을 하찮은 주변부에서 미국의 상층부로 올려놓았던 수단들이 현재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귀족들에게는 자녀들을 교육할 의향과 능력이 부족했던 반면에,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들은 갈수록 자녀 교육에 재산 뿐 아니라 기량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추세다.

 

능력주의가 만연해질수록 엘리트들은 점점 더 큰 압박을 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최고 지위에 오른 사람들마저 자신들을 형성한 칠열하고 경쟁적인 교육에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은력주의의 덫에서 탈출하는 것은 사실상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이 전 세계 대다수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정치적 의지를 모아 그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정치적 의지를 한데 모으면 정책수립에 더 큰 목소리를 낼 뿐 아니라 세상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책은 도덕적인 비난보다는 구조적 힘에 대한 정치적 인식이 현명하고 효율적인 행동의 필수조건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 책의 목표는 그 같은 인식을 지렛대 삼아 정치적으로 강력한 변화의 힘을 키우고 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 경제 질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1장

실제로 가전제품의 보급으로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었음에도 오늘날의 엘리트는 20세기 중반의 엘리트에 비해 여가를 즐기지 못한다.

 

능력주의는 두가지 힘을 통해 그 같은 엘리트 계층을 구축한다.

 

첫쨰, 능력주의는 교육을 혹독하고 치열하며 엘리트들이 참여하는 경쟁의 장으로 바꿔놓는다.

 

둘째, 능력주의는 자격요건이 엄청나게 까다롭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며 엘리트 계층을 지탱하는 일자리를 만들어냄으로써 직업세계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경제 불평등 심화는 노동 대비 자본의 우위보다는 중산층 근로자에 대해 상위 근로자의 우위가 갈수록 커지는 현상에서 비롯된다.

 

능력주의는 불평등 심화의 해결책이 아니라 근원이다. 능력주의의 내적 논리는 비민주적이고 경제 불평등 완화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능력주의의 이상 그 자체에 저항해야한다.

 

2장

20세기 중반의 중산층이 미국의 창의력을 지배했다면, 능력주의는 현재 중산층을 경제적, 사회적 삶의 중심부에서 몰아내 경제적, 문화적 낙후된 곳에 밀어 넣는다.

 

산업전반에서 고도로 숙련된 상위 근로자들이 중간 숙련도를 갖춘 중산층 근로자들을 경제 생산의 중추에서 밀어냈다.

 

1975년 이후 상위 1%의 소득이 3배 증가하는 동안 중위 실질 소득은 고작 10분의 1정도 늘어났으며 2000년 이후 중위 소득은 사실상 정체된 상태다.

 

능력주의의 내적 논리로 말미암아 부모가 생존해 있는 동안 자녀에게 제공되는 집중적인 교육은 계층 세습에 반드시 필요한 매커니즘이 된다.

 

결과적으로 평범한 교육을 받은 근로자는 엘리트 교육을 통해 엄청난 기량과 근면성을 갖춘 상위 근로자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능력주의의 소득과 지위에 대한 양면 공격은 중산층의 파괴로 나아간다.

 

능력주의가 의미 있는 작업과 기회의 확산을 활성화한다는 통념은 가짜다. 사실 그 같은 통념은 현실을 거의 정반대로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능력주의의에 따른 불평등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외 된다.

 

노력이라는 유행병은 능력주의 엘리트들을 파괴한다.

 

엘리트 어린이는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학교에서 과도하게 노력하고 엘리트 성인은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직장에서 인정사정없는 혹독한 경쟁을 감내한다.

 

능력주의 때문에 위계 구조의 상층부에 전에 없는 차등화가 나타나며 그와 동시에 사회적, 경제적 사다리도 길어지는 추세다.

 

능력주의 사다리 꼭대기에서 불안정성은 최고조에 달한다

 

부유층이 마지못해 일하는 까닭은 그래야만 그들 특유의 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적 자본은 그 소유주를 자유롭게 하기보다 노예에 가깝게 만든다.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들이 누리는 물질적 혜택도 그들의 건강이나 행복을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귀족적 구분을 되살려냈다. 20세기 중반에 부유층과 중산층은 미미한 경제적 차이를 통해 하나로 통합되었고 사회적으로 뚜렷하게 나뉘지 않았지만 이제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그처럼 모호한 상회적 경계를 예리한 것으로 바꿔놓음으로써 부유층과 나머지 계층을 다른 종류로 구분짓는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단합해 부유층에 대항할 때도 정책은 부유층이 선호하는 방향으로만 조정되고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공통된 관심하는 간과한다. 경제 불평등은 정치 불평등을 낳고 능력주의는 미주주의를 훼손한다.

 

정부는 시민을 "정치적으로 동등하게"대하기보다 중산층을 좌지우지하며, 엘리트들의 의견에는 그대로 따라간다.

 

오늘날에는 개별 부문의 불평등이 다른 부문의 불평등을 심화한다. 더욱이 경제 불평등을 조장하는 능력주의 메커니즘은 광범위하고 정치적으로 힘있는 엘리트 계층을 만들어낸다.

 

전반적으로 고립된 엘리트 계층은 지위와 소득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까지 독점한다. 엘리트 계층은 자녀에게 특권을 상속해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왕조를 만든다. 더욱이 되먹임 고리는 엘리트 교육과 상우 노동력을 연계하는 메커니즘으로 이를 통해 능력주의 시대의 엘리트는 혜택을 유지하고 정당화한다.

 

능력은 인적 자본의 착취를 정당화하고 부당한 분배를 눈가림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이다.

 

능력주의가 부상하면서 인간의 경험에는 전례없이 새로운 영역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능력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쳤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를 이해하는데 믿을 만한 안내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능력주의의 변신은 평등 신봉자들이 부지런한 엘리트들의 혜택을 빼앗아 나태한 중산층에게 제공하는 재분배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같은 이유로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을 저지하기는 어렵다.

 

부유층과 나머지 사람들의 갈등을 자본과 노동의 투쟁으로 보는 식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더 이상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포착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상위 직업이 개별 상위 소득의 주된 원천이다.

 

오늘날 경제 불평등을 신화하는 원동력은 빈곤이 아니라 부의 집중이다.

 

능력주의는 일하는 부유층에게 도덕적인 겉치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힘을 준다. 평등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일하는 부유층이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그 존재를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능력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한다.

 

엘리트끼리 결혼하면 이들의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속되기 시작하는 능력이 낭비되기보다 유달리 큰 수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한마디로 부유층 아기는 중산층 아기보다 더 유리한 상황에서 태어난다.

 

엘리트 부모의 혜택 상속은 아기가 태어나도 중단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부유한 부모는 출산 직후부터 자녀에게 유별나게 직접 투자 함으로써 많은 돈을 들여서 쌓은 토대를 활용한다. 이런 투자는 아동기 초반에 걸쳐 가정에서 계속되고 심화하다가 나중에는 외부 세계로 확장된다.

 

교육 불평등은 소득 불평등의 심화와 더불어 현저하게 증가해왔다.

 

상속되는 물적 자본과 금융 자본이 방종에 빠지려는 유혹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귀족 제도의 해체를 불러온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런 맥락에서 20세기 초반에는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유행했다. 반면에 인적 자본을 물려받은 사람은 좀처럼 그 자본을 헛되게 쓰지 않는다.

 

어릴 때 인적 자본을 구축하기 위해 근면성과 자,제력을 쌓으면 성인이 되어 그 자본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생긴다.

 

능력주의 교육은 자아가 저절로 생겨난다고 단정하기는 커녕 엘리트 아동기를 능력에 따라 성공이 보장되는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의식적인 활동을 펼치는 시기로 규정한다. 엘리트 학교 교육은 자아를 구축하고 인적 자본으로 측정하는 방향으로 절묘하게 조율되며 학생들에게 자기 도구화와 자기 착취라는 능력주의 기법을 가르쳐 엘리트 근로자를 양성한다.

 

수많은 중간 숙련도급 직중이 사라지고 소수의 직종으로 대체되면서 번지르르한 업무에 종사하는 초숙련 엘리트 전만가가 금융 산업을 지배하고, 암을한 업무에 종사하는 비전문적인 미숙련 지원 인력은 부수적인 역할만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금융부문의 노동시장은 양극화 되었다.

 

능력에 따른 불평등이 상위 근로 계층의 범위를 좁게 한정해 선망받는 직업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살을 입증한다.

 

능력주의의 수용 범위는 점점 더 좁아지고 그 안의 중압감은 가차 없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직업 분포를 보이는 노동시장에서는 일과 삶의 균형을 선택할 수 없다. 여가를 회복하려면 상위 직업과 상위 직업이 제공하는 소득과 지위를 완전히 포기하고 일리트 계층을 벗어나야 한다. 더욱이 엘리트 교율에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런 선택은 대대손손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착취를 거부하는 상위 근로자는 삶 전체가 붕괴되며 자녀들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

 

소득과 소비가 즐어날수록 행복감은 점점 더 줄어든다. 게다가 근무시간이 길어지면 근로자가 자기 삶에서 필요한 활동들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으므로 건강이 갈수록 나빠진다.

 

능력주의의 덫은 엘리트를 숙명의 소용돌이 안에 가둔다. 과거에 여가와 지위, 생산과 종속의 연관성은 베블런이 말한 유한계급 사회의 규범으로 엘리트들 사이에서 일종의 단체 협약이자 행동수칙으로 엘리트들의 과로, 착취, 소외를 방지했다.

 

능력 경쟁과 보상의 내적 논리는 그리고 능력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 경제 구조는 소외된 자기 착취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곧 자신이 거둔 성공의 부수적인 피해자들이다.

 

3장

중산층의 몰락은 미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엘리트의 자녀는 왕조적 세습의 부담을 진다. 이들의 성취는 부모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모든 면에서 능력주의 시대 불평등은 남녀 관계와 가정 내 경제력 균형에 영향을 끼친다.

 

근면성이 명예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유능한 엘리트는 베블런이 언급했던 한가로운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으며 사치품은 공훈을 대신해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형성해주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의 중산층이 엘리트 도시에 거주하는 여유를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은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이 자리를 잡으면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불평등이 나타난다. 기술에 대한 숭배로 엘리트 부모는 혁신에 초점을 맞춘 자녀 교육에 매달리고 상위 글노자들은 한층 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해 기량 숭배 경향을 강화한다.

 

이런 순환은 계속 이어지고,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시대가 지날수록 크기, 질량, 추진력이 늘어난 상태로 대대손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능력이 진정한 사회적 공헌도와 실제 업적으로 이어진다는 능력주의의 핵심 이론을 받아들이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교육 집중과 기량 숭배며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되먹임 고리가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능력주의의 기만은 불평등이 눈덩이 처럼 불어남에 따라 폭로된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찬양되는 능력주의적인 업적은 구체제에서 찬양되던 귀족적인 미덕과 마찬가릭로 가짜에 불과하다.

 

부자든 그 외 사람이든 이 같은 능력주의의 덫에서 따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둘이 함께해야만 탈출할 수 있다. 그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두 능력주의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적 평등을 구축해야한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며 각자의 지위가 공유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니는 사회적,경제적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 해소 방법

1.현재 부유층 자녀의 최고급 교육에 집중하는 교육방식은 개방되고 포용성을 가져야 한다. 최고 명문 학교와 대학에서라도 입시 경쟁이 완화되어야 하며, 훈련이 덜 소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현재 암울한 직업과 폼 나는 직업으로 분리된 일이 경제 생산의 중심에 선 중간 숙련도급 근로자에게 되돌아가야 한다. 엘리트 근로계층에게 집중된 생산이 중산층에게 골고루 분산되어야 한다.

 

엘리트에게 자유를 확대해 숨통을 틔워주면 이들은 학위를 통해 얻는 소득이나 지위가 하락해도 만족할 것이다. 팰로앨토는 포용적인 교육에 의해 변화하겠지만, 그 변화는 오히려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할 것이다. 변화는 그곳 주민에게 안전과 축복을 제공할 것이다. 20세기 중반 세인트 클레어쇼어스의 교훈은 오늘날 팰로앨토에서 이중으로 적용된다. 꾸준하고 진정한 선은 덧없고 거짓된 선보다 낫다.

 

!!중요!!

오늘날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능력주의 때문에 일 없이 놀게 되고 그에 다라 소득과 지위를 얻지 못하게 된 다수에게도, 능력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치열하고 소외된 노동을 통해 인적 자본을 착취하는 소모적 경쟁에 참여한 소수에게도 이득이 없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판에서 선동가, 사기꾼, 그 외 거짓 선지자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진짜 요구를 청취하고 부응할 여지가 존재한다. 능력이라는 것이 허울임을 폭로하는 식으로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을 진단하면, 엘리트를 특권에 집착하게 하고 중산층을 외부 이민자들에게 화풀이하도록 꾀어내는 이념을 간파할 수 있다. 진정한 이익을 보고하기 위해 인간성을 억누르는 것과 허구에 매달려 인산성을 억누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다.

 

능력주의를 명확한 시각으로 바라보자. 그러면 모든 폐해가 서로 관련되지 않은 듯 보여도 실제로는 공통된 근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인적 자본과 생한력이 점점 더 숫자가 줄어드는 엘리트 계층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이 그 근원이다. 그에 따라 부유층은 스타하노프가 했던 식으로 과도한 노력에, 나머지는 강요된 게으름에 내몰린다. 그러므로 사회 질서와 경제 질서가 한층 더 평등해지면 부자와 그 외 사람 모두의 형편이 나아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적인 평등은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케이크를 손에 넣고 먹는 것을 워하는, 즉 소득과 지위를 희생시키지 않은 채로 잃어버린 여가와 진정한 자유를 되찾고 싶어 하는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는 속임수에 넘아간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을 극심한 위험에 몰아넣는 생산의 혹독한 논리를 간과한다. 인적 자본이 소득을 낳고 노력이 명예가 되는 상황에서는 현재의 상위 근로자가 하는 것처럼 남을 지배하거나 악영향을 끼치게 만들지 않는 한 인적 자본으로 부자가 될 수는 없다. 시민들이 시민으로서의 자존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를 직시해야 하듯이, 근로자도 자유로워지고 자신에게 충실해지기 위해서는 소득과 생산을 남들과 나눠야 한다. 능력주의는 진정한 자아를 파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배로 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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